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의 일요일 사건 (문단 편집) === 주바토프와 가폰의 만남 === '''해당 항목은 가폰이 남긴 글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으므로 편향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날 미하일로프가 아카데미에 있는 내게 찾아와 어떤 사람이 나는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하면서 즉시 가자고 요청했다. 나는 동의했고 그는 나를 폰탄카에 있는 한 건물로 데려갔다. 그 건물에는 짧지만 많은 의미가 있는 «경찰국»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작은 검은 상자들로 채워져 있는 일련의 큰 방들을 통과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방에는 제국 전역에서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개인의 전기와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이 컬렉션은 러시아에서 «운명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 > >— 이제 당신은 주바토프를 뵙게 될 것입니다, — 라고 미하일로프가 말했다. 그 당시 나는 경찰국도, 이 전능한 정치 기관의 수장인 주바토프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는 웅장한 접견실에 들어섰고, 나는 40세 정도, 건장한 체격, 밤색 머리와 매력적인 눈, 솔직한 태도를 가진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를 소개 받았다. > >— 제 동료인 미하일로프가, — 주바토프는 친근하게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 당신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하더군요. 그는 당신이 노동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노동자 계급을 돕는 것을 제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신은 아마 제가 처음에 혁명 진영에서 이 일을 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곧 잘못된 방식이었음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조직은 탄탄합니다. 그들은 자체 도서관, 강의, 상호 지원 기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노동자들을 조직했다는데 성공했다는 증거는 2월 19일에 5만 명의 노동자들이 알렉산드르 2세 기념비에 화한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도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 동시에 그는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다음 날 자신에게 오라고 초대했다. > >화환에 대한 언급은 나는 노동자 자신들로부터 그것이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의 코미디일 뿐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불쾌했다. 노동자들은 해방 개혁의 불충분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바토프가 다음에 무엇을 말할지 듣고 싶어서 그에게 오겠다고 약속했다. >---- >게오르기 가폰, 회고록 中 전술했듯 사회주의 혁명세력들[* 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사회민주노동당원]]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가폰과도 친분이 있었다.]의 비방과 협박으로 인해 주바토프는 학자, 교수들을 가담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직자들로 눈을 돌렸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더 이상 제대로 된 수뇌부를 만들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성직자면서 수도 노동계에서 인망이 있었던 게오르기 가폰 신부는 최적의 인물이었고 1902년 그를 만나 포섭하려고 설득했다. 그러나 가폰은 이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고[* 가폰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주바토프가 자신을 체포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가졌었다.]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그곳의 주바톱시나 조직 간부들과 만났다. 또한 과거에 주바토프의 감독 하에 노동자 강의를 했으나 떠난 한 기자를 만났고 그에게서 이 조직이 '노동자 계급과 인텔리겐치아를 분리시켜 정치 운동을 죽이기 위해 경찰이 조직한 함정'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주바톱시나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며 '자칭 인민의 보호자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가축처럼 대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주바토프에게 이 정책이 노동 운동 참여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으며, 노동 조건을 진정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영국처럼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창설하는 것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또한 관구장주교 안토니[* 안토니는 가폰이 아카데미를 다닐때부터 후원했고, 한편으로 당시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일부 음모론적인 설에서는 권력 싸움에서 패배해 실각한 비테가 다시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혼란을 부추겼으며, '''가폰의 배후가 비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비테는 러시아 제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물증이 없는 음모론의 영역이지만 당시 비테가 활발한 여론전, 언론전을 펼쳐 정부를 비난하고 또한 온갖 트롤링과 이해하기 힘든 행적을 많이 보여줘서 그때 이미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다.]에게도 같은 내용과 여기에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신용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보고서를 보냈다. 안토니는 가폰을 지지했고 이후 성직자들의 주바톱시나 참여를 막았다. 또한 수도 시장인 니콜라이 클레이겔스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냈고 시장은 가폰을 지지했다. 이는 주바톱시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폰은 '''주바토프에게 동참하는 척하면서 이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일단 여기에 가담하기로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